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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공(文簡公)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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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공(文簡公)은 누구인가?



문과 장원 급제한 문형
좌천·강등·하옥돼도 직간한 청백리

 문간공 휘 경(絅)은 한양조씨의 13세조로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ㆍ주봉(柱峯)이다. 1586년(선조 19년) 10월 6일 한양 숭교방 흥덕동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후에는 모계(茅溪) 문위(文緯)의 문인(門人)으로 1612년(광해군 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광해조(光海朝)의 난세(亂世)에 과거와 벼슬을 단념하고 1616년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고창(高敞) 현감(縣監)과 경상(慶尙) 도사(都事)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亂)이 평정된 후 형조(刑曹) 좌랑(佐郞)과 목천(木川, 현 천안) 현감(縣監)을 지냈다.

  162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 정언(正言)ㆍ헌납(獻納)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播遷)하고 조정에서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持平)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조(吏曹) 정랑(正郞), 해서(海西)ㆍ호남(湖南) 지방의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간(司諫)으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고, 이듬해에는 집의(執義)로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淸)나라 군사를 격퇴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문관 전한(典翰) 재임시인 1643년 2월부터 11월까지 일본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오사카(大阪)와 에도(江戶)에서 왕명(王命)을 전하면서 일인(日人)들의 간교한 환대를 물리치고 일왕(日王)과 도쿠가와(德川)정권을 탁월한 시문(詩文)으로 감동시켰다.
1645년부터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홍문관ㆍ예문관 대제학(大提學),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좌참찬(左參贊), 좌찬성(左贊成)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이조판서 재임시 이도(吏道)를 쇄신하고 인재등용에 공정을 기하여 명망을 얻었다.
장릉(長陵)의 지석문(誌石文)을 찬술(撰述)하면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아니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사표(謝表)에 청나라 태종의 조문(弔文)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한 까닭과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 요구 등으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1650년(효종 1년)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신묘삼권보(辛卯三卷譜)의 서문을 썼다. 1655년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1661년(현종 2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예송[禮訟,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복상기간을 두고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정권 주도권을 둘러싼 이념논쟁]에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1669년 2월 5일 별세하였다.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安東) 김씨(金氏, 1584-1650)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두었으며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한바위 녹문산에 합장하였다. 별묘(別廟)는 신북면 가채리에 있다. 문정공(文正公) 미수(眉수) 허목(許穆)이 묘지명(墓誌銘)ㆍ신도비명(神道碑銘)ㆍ시장(諡狀)을 지었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ㆍ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ㆍ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에 배향되었다. 글씨에 뛰어났고 『용주집(龍洲集)』과 일본 견문록인 『동사록(東?錄)』을 남겼으며 포천인의 빛나는 발자취를 전하는 사찬(私撰) 군읍지인 최초의『견성지(堅城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76년(숙종 2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문간(文簡)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1695년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기고 자랑하거나 사치하지 않은 현모양처의 본보기
정경부인 안동김씨 할머니(1584.10.6-1650.11.21)는 이조판서를 지낸 효헌공[孝獻公, 휘 찬(瓚), 1543-1599, 자 숙진(叔珍), 호 눌암(訥菴)]의 1남 3녀 중 막내 따님이다. 안동 김씨는 본래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중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일본을 정벌한 제2차 여ㆍ원(麗ㆍ元) 연합군[금포옥대(錦袍玉帶)로 유명한 3세조 휘 양기(良琪)가 바로 이 부대의 부원수였음]의 원수였던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 장군이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 혈전(血戰)의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진주목사, 증(贈) 영의정,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충무공(忠武公)]장군도 바로 그 후손이다.
효헌공은 1568년 문과 급제, 대사헌, 대사간, 대사성, 경기도 관찰사,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우참찬(右參贊)까지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란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접반사(接伴使)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明)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문장가이면서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명신(名臣)이었다. 문간공 신도비명에 의하면 “할머니는 아름답고 순하며 부지런하고 삼가서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고 자랑하거나 사치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임금이 싫어해도 바른 길로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하고 평생을 청렴강직한 삶으로 일관하였기에 여러 차례 월봉과 물자를 하사하였으나 책무없이 녹봉을 받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사양하였던 것으로 보아 할머니의 어려웠을 내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찬성공의 유복자(遺腹子)인 시동생 구[구 1613-1641, 증(贈) 이참(吏參)]가 요절하여 동서(同壻) 경주(慶州) 이씨(李氏)와 한 집 살림을 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김제 군수, 전주 부윤(1644년)으로 나갔을 때 동반가족이 많다는 아전(衙前)들의 구설로 관직을 사임하였을 때에도 조카인 위명(威明)을 친자식처럼 양육하고 훈도하셨던 것으로 보아 할머니의 엄하면서도 후덕하고 자애로운 성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종형 응교공[應敎公, 휘 위봉(威鳳, 호 녹문(鹿門)과 본래부터 정분이 두터웠는데 귀하게 드러남에 이르러서도 조석으로 명령을 받들기를 소년 때와 같이 하였으며 종형께서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연석(宴席)에 가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으셨다. 이 때부터 응교공과 11살 아래인 송천공[松泉公, 휘 위명(威明)] 4촌 형제간의 돈독했던 우애와 의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송천공파에서 지은 가채리의 재실(齋室)도 두 분의 아호(雅號)를 따서 녹송재(鹿松齋)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병자호란 후에는 장릉(長陵)의 지석문(誌石文)을 찬술(撰述)하면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아니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사표(謝表)에 청나라 태종의 조문(弔文)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한 까닭과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 요구 등으로 할아버지는 1650년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의주의 백마산성에 유배되었고 할머니는 과천에서 별세하였는데 임금의 특명으로 경기 감영(監營)에서 부의(賻儀)와 물자를 내려 성복(成服)과 매장(埋葬)의 예(禮)를 치르게 하였다. 할아버지는 적소(謫所)에서 풀려나서야 비통한 마음으로 선조인 찬성공, 이판공, 이참공의 성묘 겸 할머니의 묘소를 찾아볼 수 있었다. 문간공은 늘 조정에서 드러난 분으로 귀하기는 구경[九卿, 삼정승(三政丞)과 육판서(六判書)]을 넘었으되 할머니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뒷 날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위해 지은 제문에 이르기를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간 이후로 군현의 수령으로 나간 것이 몇 차례 되었으나 부인은 역시 온전한 옷 한 벌이 없었소. 이것이 비록 부인의 재주가 졸렬한 데에서 말미암은 바이기는 하지만, 역시 성품이 검소하고 부지런하며, 나의 뜻을 잘 따라 주어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소. 또 외람되게도 임금의 은혜를 입음에 미쳐서는 이조판서를 맡게 되었는데 뇌물 꾸러미가 감히 우리 집의 대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일찍이 처족들 가운데 한 사람도 나에게 와서 간청함이 없었오. 나는 지금 이후에야 부인이 안에서 도와주는 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알겠소." 하셨다.
63세에 할머니와 사별하신 후 20년간이나 홀로 지내신 것도 오늘날과는 시대상이 많이 달랐겠지만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정분과 며느님인 초계(草溪) 정씨(鄭氏) 할머니의 어려우셨음을 짐작케 한다.
할머니는 1남 3녀를 낳으셨으니 아드님은 응교공이고 세 분의 사위는 위솔(衛率) 이유정(李惟楨), 정랑(正郞) 이돈림(李惇臨), 생원(生員) 이정징(李正徵)이다. 1584년 갑신생(甲申生), 1650년 경인졸(庚寅卒)로 수(壽) 67세(歲)였다.




<문간공 묘소>



<영 모 재>



<신도비각>



<문간공 별묘>



<용주선생 문집>



<용연서원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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