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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의 족보(族譜)



 족보란 한 가문의 원류(源流)를 밝히고 대대의 혈통관계를 기록한 역사책이다. 그 선조 중 특히 충(忠) 효(孝) 절(節)의(義)가 세상에 뛰어난 인물이나 국가사회에 특별한 공적을 남긴 명망이 있는 인물이 있을 때는 그 유업을 찬양하고 스스로 그 후손임에 자부심을 갖게 되므로 더욱 그것이 중시되고 있다. 유교를 국시(國是)로 한 조선 시대의 족보는 곧 양반의 상징이었으나 이는 사회계급의 고정화와 계급간 대립을 조장하는 등 페단도 많았기에 이제는 후손들이 족보를 이해하기 쉽게 현대 감각에 맞는 합리적이고 대중화된 족보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족보의 유형에는 시조로부터 현 세대에 이르기까지의 일족을 총망라한 대동세보(大同世譜, 대동세보는 시조 이하 동계혈족간에 분파된 어느 일파라도 이를 누락시켜서는 아니된다는 1990년 2월 27일자 대법원의 판례가 있음),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어느 한 파만을 수록한 파보(派譜), 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간단한 가계(家系)를 기록한 세덕(世德), 가승보(家乘譜) 등이 있다. 족보를 만드는 목적은 대체로 한 종족이 대동단결하여 그 활동을 더욱 촉진하고 동족 내부의 질서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동세보 및 병참공파보와 문간공파>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를 비롯하여 문간공과 그 후손이 수찬에 참여한 족보, 족보수찬과 관련한 회의, 순서합보(循序合譜) 그리고 병참공파보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이다. 우리나라 민간 족보로는 두번째인 이 족보는 1524년(중종 19년 갑신년) 문절공〔文節公, 양절공의 증손자 휘 원기(元紀) 1457-1533〕과 승지공〔承旨公, 양경공의 3자인 공안공의 증손 휘 세정(世楨)〕이 편찬한 족보로서 갑신년에 단권으로 발간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520년에 시작, 1522년 1차 마무리를 하고 문절공의 "빠진 것은 보충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 간행하여 전하라(補闕證訛壽宰以傳焉)"는 위임을 받은 승지공이 1524년 1차 보궐로 발간을 하고 1533년 판도공 이하 6세까지를 추록함으로써 2차 보궐을 완성하였으나 현재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갑신단권보는 시조공의 장자파를 본록이 아닌 추록으로 발간함으로써 수 백년간 종통(宗統)시비의 빌미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1978-9년과 2002-6년에 판도공파(충무공파) 및 첨지공파(논걸공파)를 부정하는 이들에 의하여 8차례의 쟁송이 제기되었는 바,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한양조씨대종회 통합 십년사』와 한양조씨대종회 홈페이지(http://www.hanyangcho.net)를 참고하기 바란다.


<갑신단권보 복사본>


② 신묘삼권보(辛卯三卷譜)
 문간공께서 서문을 쓰신 한양조씨 두번째의 족보이다.
1647년(인조 25년) 시작하였으나 2년 후 중단되었다가 1651년(효종 2년) 초 여름에 보청(譜廳)을 경북 영해부사 빈(贇)의 임지로 옮겨서 완성하였다. 이 때는 문간공이 병자호란 후 청(淸) 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요구로 1650년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의주 백마산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직후이다. 영해 부사 빈(贇, 병참공-판관공-한흥군의 4자)이 발문을 쓰고 부사(府使) 빈(贇)을 비롯하여 군수(郡守) 송년(松年), 성균(成均) 우신(又新), 지사(知事) 위한(緯韓), 장령(掌令) 중려(重呂), 인의(引儀) 휴(休), 직장(直長) 지맹(志孟, 병참공-판관공-현감공의 고손), 현감(縣監) 비(備) 등이 수찬에 참여하고 특히 문목공(文穆公) 극선(克善)이 지파(支派)와 서차(序次)의 편찬과 책의 완성을 마무리하였다.

③ 호동완의(壺洞完議)ㆍ장동완의(壯洞完議)
 1767년(영조 43년) 3월 1일 서울의 호동(현 원남동)에서 판도공파 대표 5인과 총관공파 대표 6인 등 11명이 모여, 그리고 이로부터 31년이 경과한 1798년(정조 22년) 6월 25일 서울의 장동(현 통의ㆍ창성ㆍ효자동의 일부)에서 판도공파 대표 4인과 총관공파 대표 10인이 모여 앞으로의 족보 발간대책을 논의하면서 시조공의 장자와 차자의 순서를 바로잡아 합록할 것을 다짐하고 후일을 기다려 수보(修譜)할 때 합보(合譜)하는 빙신(憑信)을 남겼는 바, 이를 각각 호동완의와 장동완의라 한다. 호동완의에는 아산공파의 수의[守誼, 목사(牧使)]ㆍ숙[肅, 대사간] 부자와 노주공파의 수검[守儉, 주서(注書)]이, 장동완의의 문장으로는 노주공파의 수관[守寬, 통덕랑(通德郞)]과 훤(藼) 부자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문간공의 증손과 고손들이다.

④ 정묘15권보(丁卯十五卷譜)
 1767년 호동종회와 1798년 장동종회에서 시조공의 장ㆍ차자의 순서를 바로잡아 족보를 발간키로 결정하였으나 장동완의 후 처음 편찬하였다는 무오보(戊午譜)를 주관한 익채(翼采)씨가 처음엔 합보론을 주장하다가 변심하여 순서합보는 실패하였고 익채씨 작고 후 그 아들 정환(廷煥)씨가 간행은 하였으나 판도공파는 여전히 별록에 수록하여, 1799년 판도공파는 따로 기미보(己未譜)를 만들어 총관공파는 6세까지 수록하였다. 그리고 장동완의를 주도한 문중 장로 수관공(守寬公)이 1802년 타계 후, 공의 동생인 수간공(守簡公)이 도유사가 되어 1805년 정월 25일 팔도에 합보를 추진하는 통문을 발송하고 3년만인 1807년(순조 7년) 완성한 것이 정묘십오권보(丁卯十五卷譜)이다. 이 통문에는 우리 한양조씨 역사상 최초로 시조공의 장자와 차자의 차례를 지켜 편찬한 정묘십오권보의 배경과 계획이 잘 나타나 있다. 이 통문으로 볼 때, 정묘십오권보는 장동완의 후 무오이십권보가 합보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착수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정묘십오권보는 한양조씨 역사상 시조공의 장자파와 차자파를 순서에 따라 합보한 최초의 순서합보(循序合譜)로 문간공의 증손 수간공(守簡公)을 비롯하여 수관공의 아들인 훤공(公, 구명 懿), 훤공의 동생인 임공(恁公)과 그리고 관기공(觀基公, 아산공의 증손) 상기공(象基公, 곤양공의 장손) 석필공(錫弼公, 守欽 통덕랑공의 증손)이 참여하였다.

 정묘십오권보의 통문 - “무오보는 정환이 연소하여 보사(譜事)를 잘 모르면서 간행은 하였으나 한번도 문장(門長, 도유사 수관공)에게 의논도 안하고 자기 마음대로 맡아하여 그릇되게 기록하고 주(註)를 잘못 달고 서문도 범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관공의 발문(跋文, 後記)을 지어 인쇄하려 하였으나 발문을 얻지도 못하는 등 흠이 많았다. 보책은 20권으로 160질을 만들어 8,90질을 반질(頒帙)하였으나 그 중 산질(散帙)된 것이 많고 5,60질은 물가에 있던 집에 보관 중 홍수로 유실되어 못쓰게 되었고 그 후 가게에서 휴지로 팔리거나 도배지로 쓰여 지는 것마다 유실되었던 한양조씨 족보라 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멀리 있는 종인들은, 선조에 대하여 저지른 이와 같은 죄상은 모르고 허다한 시비는 문장에게 돌아갈 것인즉 종중에 큰 낭패를 끼친 보사가 되었다. 이에 종사(宗事)와 보법(譜法)을 바르게 잡지 않을 수 없는 고로 우선 무오보를 폐기하고 다시 수정하여 장차 무궁한 폐단을 방지할 것이다. 바야흐로 보소(譜所)를 설치하고 유사(有司)를 정하여 시작할 즈음에 갑자기 시조공의 장자파를 별록에 붙인 것은 천고에 다시 없는 잘못이었다. 처음에 합보로 의견이 일치되었다가 중간에 양분되어 혹은 나라에 상소하고 혹은 북을 울려 애소하였으나 마침내 장자파와 차자파가 따로 따로 족보를 만드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자손된 자로서 원망스럽고 한탄스러운 일이다. 이에 시조 할아버지께서 모든 자손을 하나같이 보시는 마음을 미루어 받들고 선인(先人)이 증명하고 완전합의한 뜻에 따라 합보할 것을 호소하노니 전국의 종친 여러분은 수단(收單, 족보 편찬에 필요한 명단 등의 자료) 제출과 명하전(名下錢, 족보 제작에 필요한 경비로 1인당 부담액) 납부에 적극 협조하여 줄 것을 호소하노라. 이 일은 5,6개월내에 완료키로 하고 명하전은 무오보에 비하여 반감하여 어른은 닷돈, 아이는 2돈 5푼으로, 보책은 20권에 권당 8,90쪽으로 하고 책값은 24량으로 결정하였는데 먼저 낸 무오보는 쓸데없는 것이 되었으니 거두어 보내면 보소에서 책임지고 없애되 권마다 5돈씩을 책값 24량에서 감해 줄 것이라.”

⑤ 신유이십사권보(辛酉二十四卷譜)
 한양조씨 역사상 제2차의 순서합보로 1918년에 발의하여 1921년에 완성ㆍ배포하였으며 일명 관수보(觀水譜)라고도 한다. 시종원(侍從院) 부경(副卿) 종서공(鍾緖公)이 발의 기획하였고 문간공파에서는 문간공 8세손인 순천공파의 형식공(衡植公)이 서문을, 아산공파의 종석공(鍾奭公)이 기획과 교정을, 종선공(鍾宣公)이 서무를, 노주공파의 천식공(天植公)이 별유사로 참여하였다.

⑥ 계미십팔권보(癸未十八卷譜)
 계미 대동세보의 수찬 목적은 시조공의 장ㆍ차자의 차례를 지켜 합보한 1921년의 신유 대동보를 편찬한 이후 두 세대가 넘도록 대동세보를 발간하지 못한 아쉬움이다. 일반적으로 대동보는 한 세대인 30년에 한 번 정도는 편수하여야 하나 80년이 넘도록 못한 까닭은 시조공의 장ㆍ차자파간의 다툼으로 순서합보를 발간할 통합 대종회가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1997년 5월 20일 통합 대종회의 창립총회시 종익(鍾益) 회장은 회장 추대 수락연설에서 대동세보의 발간을 공약하였다. 그러나 일부의 종인이 소위 "한양조씨와는 조상도 혈통도 다른 판도공파(충무공파)와 첨지공파(논걸공파)를 함께 대동보에 수록하면 자신들의 종통과 정통성을 침해당하는 동시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입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대동보 발간배포금지 가처분소와 본안청구소까지 제기하였으나 2006년 11월 9일의 대법원 판결까지 다섯 차례의 쟁송에서 모두 패소함으로써 판도공과 총관공의 서차를 부정하고 판도공파와 첨지공파의 혈통을 부인하는 쟁송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시기에 포천 종중에서는 병하(炳夏) 문간공파종회장이 대종보의 편집ㆍ제작, 홈페이지의 개설ㆍ관리, 『한양조씨대종회 통합 십년사』를 편집ㆍ발간하였고 현재는 정인(正人) 문간공파종회 총무이사가 총무국장으로 대종회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다.



<계미18권보>


※ 이 외에 문간공파에서는 1884년(고종 21년) 호조참판을 지낸 제화공(濟華公)이 갑신이십이권보(甲申二十二卷譜)를 편찬하고 서문을 썼다. 6.25동란 후 사회가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1956년 봄 한양조씨대종회를 창립, 초대 회장에 순천공파의 영원공(永元公)을 추대하고 한양조씨대보소를[도유사 유석(維石) 병옥(炳玉) 박사]를 설치하여 대종회의 첫 사업으로 1959년 기해보(己亥譜)를 발간하였는데 유석공(維石公)이 서문을, 영원공(永元公)이 발문을 썼다.

⑦ 병참공파보-무오보(戊午譜)와 무인보(戊寅譜)
 파보(派譜)로서는 문간공파종회의 직근 상급 파계(派系)인 병참공파종회에서 1978년과 1998년에 각각 무오보와 무인보를 발간하였다. 1978년의 무오보는, 지난 500년 동안 판도공파와 총관공파에서 십 수차례 족보를 반포하였으나 한정된 수량으로는 조상을 섬기는 마음과 종족간의 돈목을 바라는 경건한 마음을 고루 나누기 부족했기에 처음으로 병참공파보를 편찬하여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고 일가간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해 펴낸 것이었다. 무오보는 1959년의 기해보(己亥譜)를 바탕으로 편찬하여 2,700부를 발행하였다. 기해보에 실린 난해한 한문의 모든 세덕문헌(世德文獻)은 석주(錫周 1905-1976, 병참공-옥천공파 25세)씨가 처음으로 국역하여 족보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족보의 간행 주기는 통상 30년인데 무오보에 이어 20년만인 1998년 무인보를 간행한 것은, 병참공파의 종인 파악이 5,000세대에서 8,000세대로 증가한 데다가, 기해보를 바탕으로 편수한 무오보가 파보로서는 처음이었던 관계로 제책과정(製冊過程)에서 부족한 점이 많아 이를 보완하면서 발간 시기를 앞당긴 때문이었다. 1996년 가을부터 수단 작성에 착수하여 전국 26개 지역 50여 명의 대의원으로부터 수단을 종합하고 정리한 결과 세덕문헌(世德文獻)ㆍ계도(系圖)ㆍ묘도(墓圖)ㆍ사진(寫眞)ㆍ자손록(子孫錄) 등 3,000여 페이지를 2권 1질로 제본, 7,000질(帙)을 발간하여 무오보보다 진일보하였다.


<병참공파보 무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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