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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회 구성 이전의 종중



  현재의 종회 회칙이 제정되기 전에는 어떤 조직의 공통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성문의 규약이 없었고 혈연 공동체로서의 문중ㆍ종중이라는 소박한 관념이 지배적이었을 뿐 종중의 재정이 없었다. 보통 단오날 별묘에 모여 잡초를 뽑거나 한식, 추석, 상달에 묘전에서 시제를 모시는 자리가 바로 문중 총회가 되었고 그 자리에서 종손이나 좌장(座長)인 원로가 당시의 현안이나 문제가 되는 사안에 관하여 설명을 하고 입장을 정리하면 그것이 바로 문중의 공론과 결정이 되고 종인들은 이에 따르면 되는 것을 미풍양속으로 여겨왔던 시절이 오래 동안 계속되었다. 따라서 웬만한 일은 종손이 단독으로 결정하기도 했고 몇몇의 원로와 상의해서 처결해도 이의가 제기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와 같은 전통은 가부장제(家父長制)적인 농경사회에서는 잘 유지될 수 있었으나 오늘날과 같은 복잡 다양한 산업화ㆍ정보화ㆍ국제화 사회에서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성문의 회칙에 의한 임원을 선임해서 선조숭봉, 종족돈목, 후손육성 등의 종사를 기획 추진하는 종회가 발생하게 되었다. 종손이 위토의 일부인 임야를 타인에게 구두로 사용 승낙을 한 뒤 종중에서도 모르는 사이에 권리금이 붙은 채 40여 년간이나 전대(轉貸)되었고 대지를 담보로 종인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어도 6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와 같은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포천 종중은 찬성공파종회가 먼저 발족되고 송천공파종회와 문간공파종회를 구성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바, <효(孝)와 우애(友愛)>로 요약되는 찬성공, 문간공, 송천공의 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찬성공(贊成公)은 아들 형제를 두었으니 장자는 문간공(文簡公) 경(絅), 차자는 유복자(遺腹子)인 이참공(吏參公) 구()이다. 그런데 문간공은 독자인 녹문공(鹿門公) 위봉(威鳳,1621-1675)을 낳고, 아우인 이참공 구(, 1613-1640)는 배위 경주(慶州) 이씨(李氏)와의 사이에서 역시 독자인 송천공(松泉公) 위명(威明, 1632-1677)을 두었다. 문간공이 아우에 대해 말하기를 “내 아우는 늘 부모님을 곁에서 모시며 음식을 만들고 약을 달이는 일들을 손수하고 남의 손을 빌리지 않으니, 이는『소학(小學)』에서 득력(得力)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또 “세상에서 형을 따르는 사람이 어찌 한량이 있으랴만 내 아우처럼 나를 사랑하고 나를 공경하는 사람은 옛날 사람 중에서 찾아보아도 드물다.” 하였다.
 그러나 이참공은 송천이 9세 되던 해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송천은 백부의 집에서 자랐다. 용주는 당대의 명사로 문장과 서법(書法)에 모두 뛰어 났다. 송천은 백부에게서 수업하여 문장과 글씨를 익혔는데, 문장에도 능했지만 특히 서법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명성을 크게 떨쳤고 백부가 지은 금석문은 모두 송천이 받아 썼다. 백부를 부친과 다름없이 섬겼고 백부도 조카를 친자식과 다름없이 아꼈다고 한다. 송천이 12살 되던 해 문간공이 김제군수, 전주부윤으로 나갔을 때 계수와 어린 조카를 같이 데리고 가야 할 사정을 조정에 고하여 허락을 받고 부임하였으나 동반가족이 많다는 아전들의 구설로 관직을 바로 사임하고 아산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큰 어머니인 정경부인 안동김씨는 엄하면서도 후덕하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조카인 위명을 친자식처럼 양육하고 훈도하셨다. 또한 종형인 녹문과도 우애가 지극하여 심지어 늘 한 방에 거처하였다. 만년에는 비록 거처가 달라졌어도 담장을 잇닿은 이웃집에 살면서 조석으로 명령을 받들기를 소년 때와 같이 하였으며 벼슬이 높고 나이가 많아졌다 하여 조금도 태만한 적이 없었다. 녹문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종신토록 잔치에 가서 풍악을 들으며 놀지 않았다.
 송천은 후에 술회하기를 “나는 타고난 운명이 기구하여 겨우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었는데 백부님께서 자식처럼 보살펴 양육해 주시고 친자식보다 더 학문을 권면해 주셨다. 이런 까닭에 나는 백부님이 나를 낳아주신 분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도 백부님의 친자식이 아님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형님도 이 아우를 동기처럼 여겨 한 집에 거처하고 한 솥 밥을 먹고 의복도 함께 입으며 우애가 두터워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였다. 장성해서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형님과 함께 있을 때 나는 형님을 의지하고 형님은 나를 의지하여 화기가 가득하였다. 이 아우는 늘 형님이 아우를 사랑하는 것이 아우가 형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함을 흠모하여 부족한 자신을 더욱 책려(策勵)하였다. 그런데 지금 형님이 먼저 아우를 잊고 갑자기 훌쩍 세상을 떠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아, 슬프다!” 종형 녹문에게 드리는 제문은 송천의 종형에 대한 깊은 우애, 절절한 슬픔이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오늘날 가채리에 지은 재실도 종형제간의 돈독했던 우애와 의리를 되새겨 두 분의 아호를 따서 녹송재(鹿松齋)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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